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독의 결단(함대 컬렉션) (문단 편집) === [[필리핀 해 해전|あ호 작전]]으로의 길 === 1943년 12월, 로호작전과 Z작전, 라바울 공습을 거치며 갈려나간 일본의 항공대가 보충되고 각 항공대가 새로 재편성되나 편성을 거칠수록 베테랑 파일럿의 비율은 점점 적어져 갔다. 일본 해군은 소멸한 1항전을 즈이카쿠 항공대로 재편성하여 전선에 남기고, 본토에서 수리중이던 쇼카쿠를 중심으로 1항전을 다시 만들었으며, 역시 소멸한 2항전은 전선공군 부대인 26항공전대로 재편, 히요와 류호를 중심으로 2항전을 다시 만든다. 반면 미군은 라바울 뉴브리튼과 뉴기니에 상륙하여 라바울과 뉴기니간의 보급선을 끊어버리지만 [[더글러스 맥아더]] 휘하의 통합참모본부는 이미 항공기지로써의 구실도 못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9만명의 병력이 남아있는 라바울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우회한다.[* 이는 무의미한 전투를 벌이지 않으려는 맥아더의 의중이 크게 반영되었는데, 딱히 휴머니즘에 기반한게 아니라 그의 명예욕과 영웅심리에 연관되었다. 이후 자신의 명예와 이해관계가 얽힌 필리핀에는 적극적으로 상륙작전을 벌인다.] 그래도 라바울이 전선비행장 역할도 못하도록 마지막으로 공습을 벌인다.(카트휠 작전) 그러나 이후 미군들의 공습이 더 이상 이뤄지지 않자 일본군은 '''또''' 자기들이 승전했다고 착각, 뉴스나 선전영화로 라바울 공중전을 크게 과장하기에 이른다.[* 하루에 미군기 69대를 격추하고 일본기 손실은 0기라거나 에이스 파일럿 [[이와모토 테츠조]]가 미군기를 202기나 격추했다거나, 항공폭탄 한발로 미군 폭격기 24기를 한번에 폭파했다거나 하여 맥아더가 라바울 공략을 포기했다는 내용으로 사실상 개소리.] 반면 뉴기니의 후방부대들은 연합군의 상륙작전에 정글을 통해 후퇴하면서 3000여명에 가까운 손실을 내고 만다. 반면 웨아크 섬에 선단호위를 온 시라누이는 잠시동안 남국의 스콜을 맞으며 휴식을 취하나 정글에 서식하던 벌레와 거머리에게 된통 당한다(...) 이곳에서 일본 육군이 중국쪽 전역에 집중하느라 뉴기니에 남겨진 15만명의 군 단위 병력들을 말라리아에 걸려 죽어가는 채로 내버리고 서쪽으로 후퇴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시라누이는 이때 만난 육군 병사에게서 고향에 이곳은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뉴기니'가 아니라 ''''죽어서도 돌아갈 수 없는 뉴기니''''라 알려달라는 말을 듣고는 자신의 말대로 처음부터 질 전쟁이었다며 분노한다. 유키카제와 아마츠카제가 소속된 해상호위대는 얼마전부터 미군의 어뢰 성능이 향상되었다는 소식을 논하다가 미 잠수함의 습격을 받는다. 일본군은 전쟁 후반기가 되어서도 수송선단들이 상부에 자신들의 위치를 보고하게 하면서 사실상 미군들에게 자기들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축함조차도 돌릴 여력이 없는 해군은 그나마 [[해방함]]에 [[폭뢰]]를 주고 잠수함에 대응하도록 시키지만 원래 무장 어선이나 호위하던 배라 함대함 전투가 약하다보니 숨어야할 잠수함이 오히려 부상해서 해방함을 주포로 공격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 아마츠카제가 이에 미 잠수함 '레드핀'을 공격하나 오히려 레드핀이 뒤로 돌아 아마츠카제를 뇌격하여 선체를 절단시키는 수준의 피해를 낸다. 유키카제는 그나마 선단과 함께 동남아에서 공출한 석유가 쌓여있는 싱가폴에 도착하나 이미 바닥을 보인 일본군의 선단수송능력으로 물자를 다 가져가는건 무리였다. 1944년 1월 24일, 일본의 특무대가 미군의 통신빈도를 분석하여 미군 항모임무부대가 하와이에서 출격하여 마셜 군도로 내습할 것이란 경보를 보낸다. 일본군도 나름대로 대응 태세를 갖췄으나, 미군은 역으로 일본군이 별 전략적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요새화하지 않은 섬들을 점령하여 비행장을 세우는 식으로 대응한다. 반면 마크 미처 소장의 TF-58은 나름대로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는 콰잘레인 환초를 장악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개시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타라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요새진지 피해가 크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아들여 진지파괴용 철갑탄을 퍼부었고 요새화가 제대로 되지 않은 콰잘레인의 일본군은 공습과 포격만으로 전멸한다. 그러나 Z작전의 종료 발표로 대형함들을 퇴피시키고 항공대를 날려먹은 일본 해군은 변변한 대응조차 할 수 없었다. 미국은 아예 일본군이 전면적으로 함대결전으로 나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결전은 해군 수뇌부의 환상으로 끝나고 만다. 이 추태에 일본군은 점점 극단적인 해결책을 생각하게 된다. 육군에서는 '함상공격기(뇌격기)로 미군을 공격하겠다'며 텐잔의 양도를 요구했고 해군도 이에 육군 전투기의 일부 양도를 요구한다. 그러다가 반려되긴 했지만 드디어 '''자폭 병기인 [[신요]]와 [[가이텐]]'''이 면전에 나타나게 된다. 미국에서 에식스급 8번함이 취역되는 와중, 육군에서는 해군은 더 이상 미군을 막을 능력이 없다며, 필리핀에서 미군과 결전을 벌이겠다며 해군에게 할당된 항공기를 자신들에게 빼달라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사토 육군대신과 시마다 해군대신, 대본영 총장이 합석한 회의에서 해군측에서 격노, 나가노 군령부 총장과 스기야마 대본영 총장간에 고성이 오가고 사토 육군대신이 해군에 대신 알루미늄을 제공한다는 합의안이 통과되자 이번엔 해군에서 시마다 해군대신에게 비난이 집중되자 도조에게 사의를 표명한다. 그러나 일본군이 서로 항공기 댓수로 싸우는 와중에도 마셜 제도 공략이 생각보다 일찍 끝난 니미츠 제독은 애너웨탁 환초 공략을 4개월 앞당겨 실행했으며(캐치볼 작전), TF-58은 이에 인근기지 무력화를 위해 잠수함 9척으로 트럭섬을 봉쇄하고 마셜 점령으로부터 고작 10일만에 트럭 섬을 포함한 일본군 비행장 파괴에 들어간다([[헤일스톤 작전]]) 아카시로부터 응급수리를 받고 본토로 출항한 아가노가 봉쇄에 걸려 미 잠수함 스케이트의 뇌격으로 침몰한 것을 시작으로 트럭 기지의 레이더에 대규모의 미군기가 감지되나 전날 경계가 풀린 영향으로 기지의 일본군들은 휴양 상태에 들어가 무방비로 공습을 받는다. 기지에 주기된 항공기 200여대를 모조리 파괴한 미군은 그 다음 선박을 목표로 9차례의 파상공세를 실행했고 아가노의 수색구조를 위해 출항했다가 돌아온 나카가 60여기의 공습을 받아 침몰, 민간 인양선을 퇴피시키기 위해 긴급출항한 선단은 스프루언스 제독의 매복에 걸려 그의 지휘하에 있던 아이오와의 포격으로 카토리와 마이카제, 아카기마루가 침몰하며 노와키는 겨우 탈출에 성공한다. 시구레와 하루사메는 공습을 피해 퇴피에 성공하고, 반면 방위능력 보강을 위해 트럭섬으로 향하던 육군 수송선단이 공격을 받고 7천명의 병력과 물자가 하루아침에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일본은 고작 97식 함공 넷과 1식 육공 셋으로 반격을 가했으나 그나마도 미 항모 한척에 어뢰를 맞추는 수준에 불과했다. 다음날에도 공습은 계속되었으며 빠져나온 함선은 아키츠시마 뿐이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일본은 순양함 셋, 구축함 넷, 그외 다수의 수송선과 상선을 손실하나 미군의 피해는 25기의 뇌격기와 항모 한척이 어뢰를 맞은것에 불과, 더 큰 문제는 이 공습으로 일본의 수송선 20만톤 가량이 가라앉으면서 하루아침의 수송력의 10%가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니미츠 제독은 이에 진주만의 복수가 이것으로 달성되었다고 평한다. 반면 미군들은 이제 마리아나에서 후속공격을 개시하였으며 1항공함대가 미 기동부대의 정보를 획득하나 반격을 지시하는 사령장관인 카쿠다와 전력온존을 위한 퇴피를 주장하는 진주만 공격대의 영웅으로 불리던 참모 후치다 마쓰오의 의견이 대립, 카쿠다의 공격지시로 공격대가 출격하여 미 공모를 5척 격침했다는 보고가 들어오나 이 역시 허위보고였다. 이후 트럭 섬과 같은 방식으로 마리아나를 공습, 93기의 베테랑을 포함한 140기의 제1항공함대는 고작 3기만 남고 전멸한다. 기지항공대의 대전력으로 결전에 임한다는 구상은 이 공습으로 붕괴하였으며, 미군이 목적달성을 이루고 돌아가 일본군은 전투력을 복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3개월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 사이 남방에서는 [[윌리엄 홀시]]와 [[더글러스 맥아더]]가 무력화된 라바울 인근을 완전히 포위한다. 특히 맥아더는 쇼맨십을 위해 작전의 피날레인 로스 니그로스 섬에는 자기 자신이 직접 장병들과 같이 상륙했다. 그 결과 라바울 기지는 배와 항공기를 모조리 상실, 12만여명의 일본군이 라바울과 그 인근에 고립되어버리면서 3개월에 한번씩 수확가능한 고구마로 연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통합참모본부는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전과를 좀더 유리하게 인정하면서 맥아더 장군은 본국에서 높으신 분들이 현지의 명장들을 몰라보고 발목이나 잡는다는 식으로 언플을 벌여 필리핀 상륙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자신의 인기를 높이기도 했다. 반면 일본 국내에서는 트럭섬의 참극에 대해 한개 사단이 통째로 증발한 육군의 항의로 도조는 스기야마 참모총장을 압박, 참모본부의 통수권을 장악하였으며 도조의 편에 붙어있던 시마다 해군대신도 트럭섬 공습을 해군정사건으로 비화, 나가노 군령부 총장을 경질하고 자신이 대신과 총장을 겸임한 후 사건을 덮어버린다. 이로써 도조는 좀 더 독재자에 가까운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황실에서도 덴노의 동생 지치부노미야가 권한을 독점하는 행보에 대한 경고를 보내나 자신은 결의를 굳혔다며 '결전비상조치요강'을 발표 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정부 비판이나 평화 운동은 정부의 적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한다. 우선 학생들에게 1년간의 공장 노동을 의무화하여 비행기를 조립하도록 시켰으며 아직 전통주의적인 면이 남은 여성들의 정식 징용이 무산되자 '여자정신대'를 창설, 노동봉사와 죽창술 교육을 독려하였으며 '''육탄 돌격 병기의 도입을 허가''', [[카미카제]], [[가이텐]]과 [[신요]], [[MXY-7 오카|오카]] 등의 개발이 진척을 이루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항공기 생산 문제로 도조와 시마다가 육군의 손을 잡자 불만을 가진 해군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마이니치 신문]]에서 도조의 정신론과 죽창술 교육을 비판하는 [[죽창사건]]이 벌어진다. 도조는 이에 크게 분노하여 마이니치를 폐간하려다 기자 개인을 징병하려 하고 알리바이로 200여명의 40대 퇴역군인들을 재징집하는 추태를 벌인다. 이때 같이 징집된 노병들은 결국 이오지마에서 옥쇄하고 만다. 일본의 자원수송역량은 점점 퇴화하여 44년 2월에는 선단 호위함에 고작 시무슈 하나만 붙은 상태에서 미 잠수함의 매복에 걸려 유조선 5척을 잃고 시무슈가 퇴각하는 큰 피해를 본다. 일본군은 이에 호위함을 늘리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효율이 떨어지더라도 대선단 방식을 사용하기로 한다.[* 사실 영국도 유보트에게 수송루트가 유린당하는 어려운 시기에 대잠호위함을 선단에 6~7기 이상 붙이고 독일의 고속전함 통상파괴에 대응하기 위해 전함을 선단호위에 붙이는 과감한 선택을 한다. 틀린 선택은 아니지만 영국이 1차대전때나 하던 실수를 반복했다는게 문제.] 그동안 [[함대결전사상]]에 기반하던 함대운용에도 변화가 일어나, 나가토 중심의 제1함대가 해체되고 [[오자와 지사부로]] 휘하에서 모든 공모를 집중운용하는 제1기동부대를 창설, 전함은 더이상 결전전력이 아닌 전위전력으로 취급하여 2함대에 배속되자 나가토는 1함대가 해체되었다는 불명예에 분노하지만 이것도 결전이라며 납득한다.[* 실제로 항모의 호위로 전함을 두게 될경우, 강력한 방공화력과 대형함이라는 특징 덕분에 항모로부터 관심을 돌리는 탱커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미 타국은 전함의 용도를 결전 대신 지상포격, 대공방어, 선단호위 등에 동원하여 놀리지 않고 사용다. 그러나 일본만이 콩고급을 제외한 나머지 전함들을 결전 전력으로 처박아둔다(...) 전함의 전위전력화는 니미츠 제독이 일본군에서 가장 뛰어난 명장으로 평가한 야마모토, 다몬마루, 오자와 셋의 경험에서 체득하게 된 것인데, 오자와가 현역 중에 최고기수가 되고서야 이 구상이 실현된 것이다.] 3월에는 인도 방면에서 육군의 '[[임팔 전투|우호작전]]'에 앞서 지원을 하기 위해 아오바를 중심으로 인도양 통상파괴작전 사호작전이 실행된다. 문제는 연합군을 교란하기위해 미군 깃발을 걸고 위장하는 시점에서 '''국제법 위반'''이었다는 점. 이 작전의 지원을 위해 독일에서도 몬순전대가 지원되고 일본도 잠수함을 보강하여 제8잠수함대와 함께 통상파괴에 나선다. 작전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지만 한가지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연합군의 선박생산능력때문에 수송선단을 격침해도 얼마 뒤 재보충이 가능해서 연합군 수송전력은 금방 복구되니까 이를 참지 못한 '''[[아돌프 히틀러]]가 승무원 학살을 요구했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독일 해군과 이들이 파견한 몬순함대에서는 [[칼 되니츠]] 제독이 이 명령을 묵살하여 포로 처형이 이뤄지지 않았으나, 히틀러의 선원 학살명령은 리벤트로프를 통해 주독 일본대사에게 전달되었고, '''일본군은 나치 독일군보다 이 지시를 더 충실히 이행했다.''' 인도양에 나가있던 잠수함[* 로110, 이26, 이8 등이 학살에 관여했다.]들이 상선을 격침한뒤 부상하여 민간인들을 기관총으로 사살하는 포로학살 행위가 이뤄지기 시작하며 [[이8]]은 이에 항의하지만 결국 자신도 명령에 따라 학살에 참여하고 만다.[* 현실에서 이8의 함장 아리즈미는 이401의 함장이 되었지만 결국 전후 귀국하지 않고 401을 미군에 인도한 후 함내에서 자살한다.] 3월 9일, 토네가 영국 상선 베허호를 발견, 처음에는 미군 함선으로 위장하여 정선을 명령하나 상선이 이를 무시하자 일본군이라 송신하고 다시 정선하라 하지만 응하지 않자 상선을 격침한다. 이 과정에서 100명의 포로를 확보하고, 인도인과 여성 20명은 적국 선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카르타에서 하선시켰으나, 80여명을 수용할 포로수용소를 찾지 못하고 상부가 '''사호작전 명령이었던 포로 학살을 재촉하자''' 결국 포로의 폭동 방지를 위해 하나하나 몰래 불러내어 군도로 살해하고 만다. 반면 육군의 우호작전은 시작부터 대차게 꼬이기 시작한다. 55사단은 버마의 영국군을 포위하였지만 오히려 자신들이 보급 부족으로 전멸 위기에 처했으며 사단장 하나야 중장은 일이 조금만 꼬여도 하급자에게 폭언을 하며 돌격 혹은 자결을 종용하는 등의 폭거를 저질러 휘하 직속사관들이 노이로제로 자살하며 부사관들이 프래깅 시도를 하려 드는 등의 악재가 겹쳤다. 슬링과 스틸웰 휘하의 연합군은 이미 일본군의 행보를 감청하여 일본군을 유인하기로 하였고 인도 진공작전의 계획을 알게 된 처칠의 지원도 늘어났다. 타쿠시로 핫토리 작전과장의 구상 하에 일본 육군은 다수의 전력을 상실한 해군 대신에 44년 대륙을 장악하고 45년에 필리핀에서 미군과의 결전을 벌인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남방군은 독단적으로 자신들이 가진 물자만으로 임팔을 공략하려 들었고 전황 악화로 내각에서의 권위를 의심받고 있던 도조는 자신의 입지를 되찾기 위해 임팔 공세를 공개적으로 홍보한다. 반면 마셜 제도가 함락된 해군은 마리아나에서의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중부태평양방면함대를 신설하고 육군 31군 사령부의 지휘권을 편입해가면서까지 방어선 강화에 주력한다. 그리고 다음 결전을 준비하기 위해 2항전으로 재편된 히요와 준요가 모였으며, 장갑항모 130호가 '[[다이호(함대 컬렉션)|다이호]]'로 개명되면서 드디어 불침공모가 전선에 등장했다며 만세삼창을 외친다. 44년 3월경, 자신들은 결전에서 몇번은 승리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미항모의 공습이 계속되자 결전 전과를 재확인하면서 그제서야 실은 자신들의 전과가 굉장히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현재 미군의 정규항모는 못해도 13척 이상은 있는것 아닌가 의심한다.(실제로는 12척)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 했던 해군은 항모들의 정박지에 제2의 진주만 공습을 벌일 수 있는지 다방면에서 검토하였으며 25일에는 뉴기니의 일본군들이 절대국방권 내의 웨아크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웨아크까지 가는 길은 100km가량이 되는 먼 길이었으며 정글을 뚫고 나가야만 했다. 그나마 사정이 좋은 사단사령부는 대발동정으로 후퇴하였으나 퇴각중 미 어뢰정에 걸려 전멸하였으며 남은 병사들이 총 한자루만 가지고 미군과 호주군, 불어난 물과 악어, 수많은 해충들, 심지어 굶주린 전우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켜야했다. 물자는 극히 부족해졌고 병자들에게는 자결 명령이 내려왔으며 패잔병들은 전사자들의 의복과 장비를 모조리 벗겨갔다. 설상가상으로 미군은 트럭 섬의 방식대로 파라오 정박지를 공습하였으며, 일본군은 군함의 퇴피를 최우선시하면서 수송선단을 미군의 공습에 노출시켰다. 홀랜디아에서는 미군의 공습으로 항공기 130기가 앉은 자리에서 파괴되었으며 이 일로 참모들 몇명이 경질되고 만다. 코가 미네이치 사령장관은 사령부가 다바오로 퇴피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실종되었으며, 후쿠도메 참모장은 세부 섬에 불시착하여 항일 게릴라에게 작전계획을 전부 빼앗기고 석방된다. 참모장은 게릴라들이 서류에 관심이 없었다고 거짓말을 하였으나 이미 맥아더의 손을 거쳐 하와이의 통합정보센터에서 해독과 번역을 마치고 각 함대 사령부에 보내지면서 신Z작전의 상세한 개요는 이미 미군에 넘어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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